<설마리 전투>
6·25전쟁 당시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와 인근 계곡에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한국에서는 ‘설마리 전투’로, 영국에선 ‘임진강 전투’로 각각 부른다. 영국군 29보병여단 4000여 명이 서울로 향하는 중공군 63군 소속 7만여 병력의 전진을 나흘간 저지한 전투다.
영국군 3개 대대 중 글로스터셔 대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워털루 전투에도 참가한 이 유서 깊은 부대는 설마리에서 붕괴 직전까지 갔다. 전투 중 58명, 탈출 중 30명이 전사했다. 대대장 카네 중령을 포함한 나머지 530명은 대부분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됐다. 포위망을 빠져나간 병력은 63명에 불과했다. 언뜻 패전으로 보이지만 영국에선 ‘영광의 글로스터셔’라며 이들을 칭찬한다.
첫째 이유는 불굴의 투혼이다. 235고지에 포위됐던 글로스터셔 대대는 총알과 박격포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싸웠다. 중대장으로 참전한 패러호크리(1924∼2006) 대위는 중공군 피리 소리에 맞서 나팔수에게 “진격나팔을 불어라”고 명령했다. 나팔수 부스 하사는 후퇴 신호를 제외한 모든 레퍼토리를 연주하며 전우들을 격려했다.
둘째는 이 작은 전투가 제2의 1·4후퇴를 막았다는 것이다. 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지만 중공군은 속공으로 재점령한다는 작전 아래 4월 춘계 공세에 나섰다. 하지만 영국군에 발목이 잡히면서 작전은 무산됐다. 그동안 유엔군은 서울 북부에서 반격 준비를 마쳤다. 중공군은 그 뒤 다시는 대대적인 공세를 펴지 못했다.
현재 북한에 대사관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념이 다르고 한 때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지금도 진영이 다른데
어떻게 대사관을 오래전부터 개설하고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얼까요?
6.25 전쟁때 우리의 교전국이였던 중공에 우리는 대사관뿐만 아니라 대규모 투자 와 관광도 하고 있지요.
우리 또한 베트남에서 현정권인 월맹과 전쟁을 치뤘지만, 역시 중국 과 마찬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6.25때 북한보다 더 증오스러운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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