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리더십의 재발견-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 이주천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22.12.01 14:52
이주천(원광대 교수 역임, 객원논설위원)
작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연희동 자택에서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와서 유골이 집안에 안치된 상태이고 그의 영혼은 구천을 헤매고 있다. 그 이유는 서울현충원은 고사하고 대전현충원에도 묻힐 장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 경제 10위권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국가적 수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생의 염원인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해 국민들 몰래 5억 달러를 북한에 상납하여 북한 핵개발에 공헌했다는 의혹을 산 김대중 같은 ‘친북’ 대통령도 현충원에 안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유골은 현충원 안치를 거절당해야만 했다.
5·18 광주의 비극을 논외로 한다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은 김영삼이나 김대중과 같은 문민 대통령과 비교하면 월등하다고 볼 수 있다. 기실 한때 김대중의 최측근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한 재야 원로인사는 80년 서울의 봄 시절 양김 씨가 단일화만 이뤘더라면 5·18 광주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5·18이 발생하게 된 저변에는 양김의 책임도 일부 없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는 회고록을 준비 중이다.
국정원까지 동원해 무리하게 노벨평화상을 타낸 것도 모자라 북한이 핵무기를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DJ와 경제에 대한 무지로 결국 IMF 사태를 몰고 온 YS의 행보에 비춰볼 때 과연 두 양 김 씨는 대통령으로서 어떤 탁월한 업적을 달성해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지 아리송할 뿐만 아니라 훗날 역사는 냉혹한 평가를 할 것이다.
한 달 전에 발간된 지만원 박사가 쓴 『전두환 리더십』은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의 업적을 탁월하게 정리하고 있다.
지 박사는 “우리는 앞으로 상당 기간 전두환과 같이 애국심 있고, 능력 있고, 비전과 직관력을 가진 ‘위대한 리더’를 다시는 대통령으로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핵심은 전두환이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그가 쓴 참모들도 미국식 교육받은 엘리트였다는 점에 있다. 유능한 참모들을 발탁하여 국가운영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전두환 이후 ‘엘리트 경영’이 사라졌다.” 지 박사는 “정치 모리배들이 대통령이 되고, 북한에 굴종하면서 퍼주지 못해 안달하는 정치를 했다”라고 한탄한다.(p.11)
『전두환 리더십』은 일반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전두환의 리더십에 대한 비화(?話)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특히 육사 시절 재래식 화장실에서 헝겊을 덮고서도 몰래 책을 읽곤 했던 독서광으로서 전두환의 학구적 노력은 일반 국민들이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대구공고 출신 전두환이란 이미지를 세척하게 만든다. 박정희는 일본의 자본을 빌려오고 일본의 기술을 부지런히 배워 ‘모방 생산’ 시대를 열었던 반면에, 전두환은 박정희 리더십의 한계를 뛰어넘어 창의력을 개발시켜 ‘브랜드 생산 체제’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두환의 리더십은 오늘날 세계적인 IT강국, 문화강국, 체육 강국을 만들어내는 금자탑을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건국 이후부터 지금까지 국가운영을 시스템 차원에서 엘리트 경영을 한 대통령은 오로지 전두환 대통령이 유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1979년 10·26부터 80년 5·18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에 빠져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오로지 홀로 결단으로 추진된 석유, 화학, 조선, 기계, 금속, 철강, 비철금속 등 중화학공업이 투자자본의 부족과 수출시장의 미비로 경제 위기에 빠졌으며, 국가는 막대한 차관과 외채의 이자도 갚지 못했으며, 대기업은 빚더미로 인해 도산위기에 직면했었다. 20-30대의 청년들은 대량 실업자로 몰려 미래의 희망을 포기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필자도 그런 와중에서 몸부림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를 타개한 인물이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준비된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생일대의 꿈인 산업화가 10·26사태로 인해 물거품이 될 국가침몰의 위기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산업화를 완성시켜 마침내 대한민국을 현대국가로 변모시켰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불과 40년 만의 쾌거였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선사했고, 유학을 자유화했으며, 통행 금지를 없애는 용단을 내렸다.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여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다. 심지어 연좌제를 폐지했으며, 금서목록을 해제하여 공산주의 서적도 자유롭게 읽도록 학문적 자유를 허용했다. 심지어 5·18의 배후 주동자 혐의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김대중을 감형, 석방하여 미국으로의 망명을 허용하는 정치적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연좌제 폐지로 인해 가장 정치적으로 혜택을 받은 인물이 김대중과 문재인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 둘 다 ‘민주화 붐’을 타고 대통령들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7년 단임’을 약속하고 자기 발로 청와대에서 물러난 점에 있다. 그러나 그 약속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는 정적들에게 다시 재기할 기회를 허용하였고, 결국 5·18이란 덫에 걸려서 퇴임 이후 평생 곤욕을 치르게 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관용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로마공화정의 내란을 평정한 주역, 율리시스 시저를 떠올리게 된다. 전두환의 사망 1주기를 맞이하여, 필자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과연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국정원까지 동원해 무리하게 노벨평화상을 타낸 것도 모자라 북한이 핵무기를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DJ와
경제 무지로 IMF 사태를 몰고 온 YS의 행보에 비춰볼 때 과연 이들은 대통령으로서 어떤 탁월한 업적을 달성해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지…
왠 국립묘지? ㅎㅎㅎ
파주에도 못 묻었는데 말야... ㅎㅎㅎ
갈 곳 잃은 전두환 유해…파주 땅주인도 "안 판다"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55124&pDate=20231206
전두환씨의 '북녘땅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파주에 유해를 묻으려던 유족의 시도는 결국 좌절됐습니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데 이어, 땅 주인도 오늘(6일) "팔지 않겠다"고 못 박으면서입니다. 사망 2년이 넘도록 유해가 연희동 자택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살아 생전 사과는 커녕, 호통을 친 전씨를 향한 국민적 공분이 사그라들지 않은 탓이겠죠. 또 하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전씨가 끝내 내지 않은 추징금 920억여원인데, JTBC는 전씨가 사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전씨 일가의 재산을 추적해 왔습니다.
[단독] 전두환 일가 1조원대 부동산 사업…검찰 환수팀은 "몰랐다"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2155123&pDate=20231206
전두환씨가 집권하며 기업 등에서 거둬들인 돈은 확인된 것만 9500억원입니다. 그 시절 9500억원이니 어마어마한 돈인데 전씨는 돈이 없다며 추징금 922억원을 끝내 내지 않았고 유족들은 '물려받은 돈이 없으니 추징금을 대신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추적해보니 전씨 일가는 1조원대 부동산 사업을 몰래 해왔고 이를 밝혀내 환수해야 할 검찰은 이런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핵빛 정책 위선자가 냉전 볼쒜비즘 등에 업고 집권 했더라면 홍삼 대장 동무의 집권 아래 세계 최악의 국민 고통.
통일을 막아 세습가문을 지킨 핵빛 정책으로 입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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