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선의 선정
일본은 경부철도 부설을 위해 5차례의 대규모 노선 답사를 실시한다. 1차 답사는 1892년의 비밀 답사이다. 이때 일본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조류 표본을 제출하기 위한 구실을 내세웠다. 이때 노선은 조선 남부 지역의 경제 발전 지역을 통과하여 군사적, 경제적 역할을 강조한다. 제 2차 답사는 청일전쟁중인 1894년 11월에 실시 됬으며 이때 추풍령 횡단 노선이 발견된다. 이때는 군사적인 역할이 강조되 서울 - 부산간 최단 거리로 설정된다. 제 3차 답사는 1899년 3월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주도로 이루어 졌다. 이때는 경부철도합동조약이 발효된 후라 비교적 정밀하게 측정하게 된다. 이때 경부철도주식회사 발기인인 오에 타쿠가 고종을 알현하고 선로 선정에 상공업 발달 지역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답사한 노선은 경기, 충청, 경상도의 평야지대를 관통하며 노선의 일부를 경기, 충청의 서쪽을 지나게 함으로써 조선이 1898년부터 진행하던 서울 - 목포간의 철도를 방해하고 거의 모든 상공업 중심지를 지남으로써 향후 건설되는 모든 노선이 경부철도의 지선으로써 건설될수 있게 경부철도의 노선을 선정한다. 제 4차 답사는 1900년 3월 일본군과 경부철도주식회사의 합동으로 실시된다. 이때는 다시 군사적인 역할이 강조되서 선로를 최대한 직선으로 부설하려고 노력한다. 제 5차 답사는 1903년 3월 실시됬다. 이 노선또한 군사적인 면을 강조되었고 결국 제 4차 답사와 비슷한 노선이 결정된다.
경부선의 노선 결정을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북부노선의 경우 수원부근의 왕릉과 지지대 고개의 문제이다. 조선은 철도가 선왕의 묘역을 통과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한다. 이때 풍수설까지 동원하여 반대논리를 폈으나 일본이 풍수사와 현지 답사하여 아무 문제가 없음을 설득하여 결국 화산과 안산 사이를 통과한다. 다음은 지지대 고개 문제이다. 정조의 효심을 기리는 비가 설치되 있는 이 고개를 통과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여 조선이 추가 비용을 부담하여 북부 노선을 서쪽으로 이동시키게 된다.
다음은 중부 노선의 경우이다. 중부 노선의 경우 최단거리를 이을 경우 속리산을 통과하는 어려움 때문에 우회 노선을 선정하는데 노선의 구배와 공사의 편의를 위해 대전을 통과하는 노선으로 결정된다. 대전은 군사적으로는 서울과 최단 거리와 연결되고 호남의 곡창지대와 최대한 가깝게 연결되는 곳으로 중요성을 가진다.
남부노선의 경우 본래 성주 - 현풍 - 창원 - 김해 - 부산을 지나는 노선이었으나 김천 - 성주의 험준한 지형과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교량을 더 많이 건설해야 되기 때문에 현재의 노선으로 결정하고 마산쪽은 지선을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결정된 노선은 결국 일제의 최초 의도대로 한반도 남부의 경제가 경부선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고 후에 부설된 호남선이 경부선의 지선으로 밖에 기능할수 없도록 만들게 된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불균형은 이 때문에 비롯됬다고 할수 있겠다.
제 1차 답사 노선
서울(남대문) - 용인 - 죽산 - 청주 - 문의 - 상주 - 대구 - 밀양 - 부산
제 2차 답사 노선
서울 - 청주 - 영동 - 추풍령 - 금산 - 안동 - 대구 - 밀양 - 삼랑진 - 부산
제 3차 답사 노선
서울 - 노량진 - 진위 - 둔포 - 전의 - 공산 - 논산 - 은진 - 금산 - 영동 - 대구 - 현풍 - 창녕 - 영산 - 밀양 - 삼랑진 - 구포 - 부산진
제 4차 답사 노선
서울 - 노량진 - 진위 - 둔포 - 전의 - 회덕 - 영동 - 대구 - 청도 - 밀양 - 삼랑진 - 초량 - 부산진
제 5차 답사 노선 - 4차 답사 노선과 비슷, 최종 결정안
1926년 현재 노선 현황
경성 - 용산 - 노량진 - 영등포 - 시흥 - 안양 - 군포장 - 수원 - 병점 - 오산 - 서정리 - 평택 - 성환 - 천안 - 소정리 - 전의 - 전동 - 조치원 - 내판 - 부강 - 신탄진 - 대전 - 세천 - 옥천 - 이원 - 심천 - 영동 - 황간 - 추풍령 - 직지사 - 김천 - 대신 - 구미 - 약목 - 왜관 - 신동 - 지천 - 대구 - 고모 - 경산 - 삼성 - 남성현 - 청도 - 유천 - 밀양 - 삼랑진 - 원동 - 물금 - 구포 - 부산진 - 초량 - 부산
선로 궤간의 선택
경부철도는 애초에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염두해 두고 건설된 노선이다. 이러한 이유로 철도의 궤간도 논란이 되었다. 당시 영국이 부설하던 중국의 경봉철도는 표준궤, 러시아가 건설하던 시베리아철도와 동청철도는 광궤, 일본 국내는 협궤였다. 하지만 먼저 조선 정부는 앞서 1896년 7월 발표된 ‘국내 철도규칙’에서 표준궤를 설치할 것을 규정한다. 하지만 광궤의 러시아가 압력을 넣어 광궤로 개정하게 된다.(1896.11.15) 하지만 러시아를 몰아내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미국에 의해 다시 표준궤로 규칙을 개정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 철도 작업국과 참모본부는 경부선의 자본과 수요의 부족, 그리고 경부철도를 최대한 빨리 건설하기 위해 협궤를 주장하나 경부철도주식회사의 강력한 주장으로 표준궤로 건설하게 된다.
경부철도를 비켜가게 했던 지지대고개 - 사진은 지지대비,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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