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가 해병대는 개병대라고 하면서 이유는 해병대 사람들은 욕 잘하고 깡패 같은 사람이라고 하시는데 맞나요? 또 다른 이유도 있나욤?
해병대를 실제 개병대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병대의 '개'는 한자에서 쓰이는 '열다' 라는 의미의 글입니다.
원래는 6.25 당시 전장에서 올린 혁혁한 공을 기리기 위해 사용되어진 말이었으나 어느순간 몇몇 사람들에 의해 와전된바가 없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 바로 잡습니다.
아래 글은 해병대 약사에 올라있는 글인데요 그 중 해병대에 개병대라는 명칭이 붙게된 정확한 이유가 있어 올립니다.
(내용이 장황한데요...귀찮으시면 제일 아래부분만 읽으세요^^;;)
*도솔산지구작전
적의 춘기공세를 분쇄하고 북상한 해병대는 1951년 6월 3일 화천저수지일대까지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맡은 전투지역은 38선 이북의 양구와 인제 간에 있는 태백산맥 가운데서 가장 험악한 지역 이었다. 이 지역은 도솔산지역으로서 일찍이 유엔군이나 우리 국군이 한번도 진격하지 못한 곳이었고 적이 또한 난공불락임을 호언하던 천연 요새이기도 하였다.
적은 이 곳에 틀어박혀 발악을 하였는데, 이 지역은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게 된다면 우리 해병대와 좌우에 있는 우군의 계속진출이 매우 용이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적에게 포위 당할 우려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해병대가 담당한 도솔산지구일대는 양양에서 철원을 3각의 저변으로 하고 원산을 정점으로 하는 중동부의 이른바 철의 3각지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은 이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아군의 공격을 저지 하려 하였는데, 여기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 최강을 자랑하는 정예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군의 공격목표인 23 및 24고지를 두고 2, 4, 9, 11 및 18고지를 연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도솔산지구 전투 개요 (1951.6.4~19)
주저항선에는 견고한 진지가 구축되고 막대한 수량의 지뢰가 매설되어 거듭된 공격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는 끝까지 감투정신을 발휘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고지들을 모두 점령하였다.
이 도솔산지구작전은 최초 미해병 제1사단의 제5연대가 담당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4일 이른아침 우리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해병대에서 8목표전방 약2km지점의 고지를 점령하는데 무려 5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고, 다수의 전쟁후유증인 정신질환자까지 발생하여 부대정비 및 재편성의 기회를 갖기 위해 국군해병대 제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접우군으로서는 좌측에 미해병 제7연대, 우측에 제1연대가 있었고, 미해병 제1공병대대의 제2중대 제3소대와 제11연대 제3대대(포병)가 우리 해병대를 직접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무를 교대할 우리 해병대에 미해병대가 제1사단으로부터 6월 3일 24시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이 하달 되었다.
1) 제1대대는 6월 4일 오전 8시 이전에 680고지, 910고지 부근에서 목표1을 점령할 준비를 하고 이어서 목표2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2) 제2대대는 6월 4일 오전 8시 이전에 105.7고지 남쪽의 912고지 부근을 전령후 이어서 목표8과 목표7을 점령할 준비를 갖추라.
3) 제3대대는 연대예비대로서 800고지 부근을 점령하고, 증강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고지3을 점령 후 연대우측을 엄호하라.
당시 우리 해병대 중간보급소는 광사동 부근에 있었고, 연대본부는 원동지곡, 그리고 의무대는 죽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6월 4일 새벽 총공격에 앞서 연대장 김대식대령은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요지의 훈시를 내렸다.
우리 해병대는 1951년 6월 4일 오전 8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고 일진일퇴하는 가운데 6월 12일에 이르러 Kansas Line 안의 16개 고지 전부를 점령하였다.
Kansas Line 이남의 전략적인 요지를 상실한 적은 완전히 사기를 잃게 되어 나머지 17부터 24까지의 8개 고지는 비교적 용이하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해병대 정면에 포진되었던 적은 인민군 12 및 32사단이었으며 우리 해병대가 점령한 14목표와 그앞에 있는 17목표 사이의 대암산봉 능선일대에 집결되어 있었다.
Kansas Line내의 1목표에서 16목표까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어서 Badger Line의 17에서 24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제2단계 작전을 6월 13일부터 개시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11고지를 근거지로 삼고, 제2대대는 9 및 10고지의 진지를 강화하면서, 제3대대는 13고지 에서 도솔산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각각 정찰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2대대가 6월 15일 오전 8시에 공격 을 개시하여 17, 18 및 19고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작전개획은 이후 제3대대가 목표 20, 21 및 22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할 때, 측면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은 계획 밑에 제2대대는 17일 8시 31분에 임무를 완수하고 제3대대가 공격할때, 능률적으로 지원 하였다.
적은 고지 후면 암석에 잠복하여 저항해 왔기 때문에 육박전을 감행한 끝에 6월 17일 12시 30 분 20고지를 점령하고 다음 날에는 21고지, 그리고 19일에는 22고지를 차례로 탈환하여 드디어 도솔산 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어서 제1대대는 11고지와 14고지로 이동하여 23 및 24고지를 점령할 준비를 갖추고, 19일 7시에 22고지부근까지 전진하여 8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9시 30분에 23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미해병대 제7연대는 우리 해병대의 좌측에서 24고지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고, 6월 20일 제3대대가 24고지를 인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솔산일대의 산악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리 해병대의 찬란한 공훈에 대하여 당시의 국회의장 (신익희)은 감사문을 신현준사령관에게 보내왔고, 또한 미국대통령은 참모장 김성은대령과 제1연대장 김대식대령에게 미국은 성훈장을 수여하였다.
도솔산 24개고지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이 고지들을 위협하는 적 3개대대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대우산을 7월 8일부터 2일간 걸쳐 공격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린다음, 7월11일부터 17일까지 방어전에 임하였다.
이와같이 6월 4일부터 7월17일까지 40여일동안 대규모의 산악전을 수행한 우리 해병대는 전선을 미육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인계하고 홍천지방으로 이동하여 차기작전을 수행할 준비에 임하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십여년후에 월남에 파병된 해병대 청룡부대가 미군과, 프랑스군이 십여년간 공격했어도 함락시키지 못한 난공불락의 고지를 하룻만에 점령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한 것은 이러한 선배해병들의 "임전무퇴"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도솔산에서의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포연이 가시지도 않은 전투현장에 날아와, "무적해병" 이라는 휘호를 내리고, 전장의 승리를 여는 무적의 군대라는 의미로 '개병대'라 부르며 지휘관과 병사들을 치하했다.